자식 없는 한(恨)(갈산면 취생리, 김상배의 처 경주 김씨 열녀비)
●●● 우물가의 쑥덕공론
1942년 동짓달 어느날.
이른 아침에 우물가로 물을 길러 나왔던 동네 여인 서너명은 깜짝 놀랐다.
여인들은 번갈아 가면서 우물안을 바라보고는 의미있는 눈빛을 주고 받으며 수근수근하기 시작했다.
"맞지? 틀림없지?"
"맞아, 틀립없고 말고……. 그게 도대체 누굴까?"
여인들은 우물안을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 보면서 틀림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여인들이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우물안에는 조그만 막대기 한 개가 둥둥 떠 있었다.
그런데 그 막대기가 물속에 잠겨있는 모양이 특이했다.
보통의 경우 막대기가 물에 들어가면 물위에 누운채 둥둥 떠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날의 막대기는 세로로 빳빳이 선채 우물 속에 잠겨있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에 옛날 사람들은 '삼이 섰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에 동네 여인들 가운데서 누군가 임신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풍습이 있었음)
"도대체 이 기쁜 소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동네 여인들은 주욱 둘러서서 한집 한집 손으로 짚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이를 임신할 만한 마땅한 집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인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을 되짚어 보았다. 그래도 아이를 가질 만한 젊은 아낙네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수군거리고 있을 때였다.
"맞다, 맞아. 그럴지도 몰라."
한 여인이 무릎을 탁치며 소리쳤다. 모두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렸다.
"김씨댁 셋째 며느리……."
여인은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듣고 있던 여인들은 금방 낯빛을 흐렸다.
'에이, 설마……. 남편없이 어떻게 혼자서 임신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남편 죽고 나서 벌써 외간 남자라도 보았단 말인가?'
여인들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러나 여인들의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은 또다시 금방 바뀌기 시작했다.
여인들의 머리 회전은 컴퓨터처럼 빨랐다.
여인들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루 이틀 날짜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간지 이제 겨우 이십여일 밖에는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의 씨앗을 잉태하고도 남을만한 계산이 충분히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 맞아. 그럴 수도 있겠어."
소문은 삽시간에 온동네로 퍼져 나갔다. 김씨댁에도 이 소문은 금방 들어갔다.
이 소문을 듣고 난 김씨댁은 식구들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이구. 이렇게 기쁠 수가. 우리 김상배. 이 세상 떠난 줄 알았더니 아주 가진 않은 모양이구나.
제발 떡두꺼비 같은 아들 씨앗이나 하나 남겨놓고 갔으면 좋으련만……."
김씨댁 식구들도, 동네 사람들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빌고 또 빌었다.
●●● 자식 없는 한(恨)
'김상배의 처 열부 경주김씨'
그녀는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김자수의 18세 손인 동명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리하여 19세가 되었을 때 갈산면 취생리 김현규의 삼남 상배에게 출가해 왔다.
그녀는 삼형제 중의 셋째 며느리로 출가해 왔지만 가정 형편상 따로 분가하여 살림을 차릴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시부모님과 두 분 형님 내외분을 모시고 효성스런 며느리로, 우애있는 막내 동서로 집안 살림을 잘 돌보아 나갔다. 이 세상 모든 열녀들의 행적이 그러하듯이 그녀 역시 집안과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할 만큼의 부덕을 갖춘 여인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녀에게 여인으로서 갖춰야 할 착한 심성을 내려주신 대신, 가장 중요한 자식을 점지해 주시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는 결혼한지 10년이 가까워지도록 태기가 없었다.
두 분 손위 동서들이 낳은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는 자식이 없으니 언제나 저런 모습을 보나?"
그녀의 남편 상배는 가끔 술에 취하면 조카들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 내뱉곤 했다.
그녀는 남편이 푸념하는 듯한 한 마디가 제일 참지 못할 아픔이었다.
하다 못한 그녀는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다 푸닥거리도 해보았고, 몸에 좋다는 음식도 먹어 보았다.
아기를 가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빼놓지 않고 해보았다. 그러나 모두 헛일이었다.
자식을 갖지 못한 안타까움이 맺혀 병으로 나타난 것일까.
어느날부터인지 남편 상배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의 직접적인 시초는 징병에 끌려가는 친구와의 이별주를 마시며 먹었던 돼지고기 때문에 탈이 난 뒤부터였다.
그녀의 극진한 간호에도 남편의 병은 별로 차도가 없었다.
그렇게 앓기 시작한 남편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동짓날 초순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의 죽음을 맞이한 그녀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슬픔이 깊으니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남편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할 뿐이었다.
정신없이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야 남편의 죽음이 실감났다.
해일이 일듯한 기막힌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때 자식이라도 품안에 안고 있으면 삶의 용기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런 팔자도 타고나지 못했으니 더욱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래, 남편의 뒤를 따르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 실망 뿐인 희소식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죽음을 결심하고 난 그녀에게 난데없는 임신이라니.
십 년 동안이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남편의 씨앗을 이제야 잉태하다니.
그녀는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살아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남편의 원을 풀어줄 수 있게 됐으니 춤이라도 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십 년의 세월을 얼마나 속고 또 속아 왔던가.
그녀의 몸에 조그만 이상이라도 있으면 혹시 임신이 아닌가 하고 기대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가슴을 졸이며 기다린 결과는 모두가 헛일일 뿐이었다.
달마다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빨간 꽃은 그녀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 놓을 뿐이었다.
동네 사람들과 집안식구들은 그녀의 임신을 이미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동네 여인들 몇 명이서 주고 받은 몇 마디가 어느새 헛소문이 아닌 사실처럼 변 해버린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지않았는가. 자네의 정성이 그토록 지극한데 하느님인들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거지."
동네 사람들도 그녀를 보면 축하 인사를 해주기에 바빴다. 그때마다 그녀는 입장이 난처했다.
'내가 정말 아기를 갖긴 가진 것일가?'
옆에서 너무들 떠들어 대니 그녀 자신도 사실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기다려 보자. 며칠만 있어 보면 알 것 아닌가.'
그녀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십 년을 가다렸는데 그까짓 며칠을 더 못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혹시 하느님께서 자식을 점지해 주신다면 이를 악물며 아이를 잘 키우리라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남편의 뒤를 따르겠다던 생각은 저 만큼 밀려나 있었다.
그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달마다 손님이 찾아 오는 날짜를 기다렸다.
제발 이번 만큼은 손님이 찾아오지 않기를 빌고 도 빌었다.
며칠 후, 식구들은 실심한 얼굴로 산에서 내려오는 그녀를 발견했다.
남편의 산소에 다녀온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가 있었다.
그녀의 큰 동서는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 그녀를 꾸짖었다.
"이 사람아, 간사람은 잊어버리고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정신차려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뱃속에 있는 아기 생각을 해서라도 힘을 내야지. 죽은 사람도 자네의 그런 모습을 원하지 않을걸세."
그러나 그녀는 거칠해진 얼굴에 눈물만 뚝뚝 흘리며 흐느낄 뿐이었다.
"형님, 김상배 아주 안간줄 알았더니 아주 갔습니다.
야속한 양반, 자식 하나 남겨놓고 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큰 동서의 품안으로 와락 파고들며 흐느꼈다.
"동서, 갑자기 왜 그러는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큰 동서는 그녀를 감싸 안으며 되물었다.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살면 무얼합니까? 임신이 아니었습니다."
"뭐라구……? 설마……"
큰 동서는 무슨 말로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할말을 잃고 말았다.
기대가 너무 컸으니 실망도 커서 다리만 후들후들 떨리고 가슴만 쿵쿵 뛸 뿐이었다.
●●● 남편 곁으로
그날은 마침 면사무소에서 회의 소집이 있는 날이었다.
일제 말엽, 툭하면 불려 나가 물자 공출과 인력 동원을 강요받던 시절이었으니, 이날도 동네 여인들은 집집마다 소집명령을 받고 아침 일찍 면사무소로 향했다.
김씨댁 두 며느리 역시 막내 동서의 배웅을 받으며 면사무소로 향했다.
갈산면 취생리에서 면소재지까지는 20리가 넘는 먼 길이었다.
그것도 엄동설한에 걸어서 다녀와야 하는 길이니 그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형님, 얼음길을 추워서 어떻게 다녀오시겠습니까? 조심하십시오, 형님."
그녀는 집앞 먼길까지 두 동서를 배웅했다.
"우리 걱정은 말고 집이나 잘 좀 보게나. 애들 좀 잘 돌보구……."
두 손위 동서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집으로 들여 보내며 길을 재촉했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한나절을 앉아 있던 큰 동서는 예감이 이상했다.
집을 나올 때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자꾸만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전 같았으면 집앞에서 자연스럽게 배웅을 해주던 막내 동서였는데, 먼 길까지 일부러 나오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꼭 먼 길 떠나는 사람을 보내듯이 눈물을 글썽이며 배웅하던 모습도 이상했다.
큰 동서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가시 방석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지금 집에 남아있는 남자들은 동네 방앗간으로 방아를 찧으러 가고 아무도 없는 형편이었다.
어린애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무엇을 알 것인가.
막내 동서 혼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집에 혼자 남아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었다.
큰 동서는 몸이 후끈 달아 올랐다.
더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이봐요, 아주머니. 회의 도중에 어디를 가는거요?"
문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젊은 남자가 큰 동서를 불러 세웠다.
"저요? 화장실에 갈 일이 좀 급해서요……."
큰 동서는 얼떨결에 화장실 핑계를 대며 간신히 면사무소를 빠져 나왔다.
큰 동서는 춥고 빙판진 길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단숨에 집앞 삼거리까지 달려 왔다.
그때였다. 옆집에 사는 집안 아저씨가 맞은편에서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구, 아주머니. 마침 잘 오십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랍니까. 아, 글쎄.
상배 처가 조금 전에 집에서 목을 매고 말았습니다."
"네에? 막내 동서가요? 아이고, 이 미련한 사람이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큰 동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어쩌면 이렇게 불안하던 예감이 그렇게 딱들어 맞았는지 기가 막혔다.
왜 진작 동서에게서 그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가슴을 탕탕치며 울부짖었다.
큰 동서가 동동거리며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누워 있었다.
아무리 부등켜 안고 오열을 해도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남편 죽은지 꼭 한 달이 지난 날이었다.
삼일 후, 그녀를 태운 상여는 남편 곁을 향해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천지 만물중에 사람밖에 또 있는가 어허 어허 어허 어해야
여보시소 시주님네 이내말씀 들어보소 어허 어허 어허 어해야
석가여래 공덕으로 아버님전 뼈를 빌고 어허 어허 어허 어해야
어머님전 살을 빌어 제석님전 복을 빌어 어허 어허 어허 어해야
구석구석 웃는 모양 애닯고 서글프고 어허 어허 어허 어해야
절통하고 통분하다 할 수 없다 할 수 없어 어허 어허 어해야
……
29세의 짧은 인생이 너무 아깝고 슬퍼서일까.
그날따라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은 구슬픈 상여 소리와 함께 온 천지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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